케이토토가 스포츠동아와 함께 다문화가족 출신으로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선수들과 이들을 지원하는 여러 체육인들을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문화 가족 어린이와 청소년, 부모들의 꿈과 용기를 응원하는 이번 연재 기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스포츠를 통해 희망 찾는 다문화 가족⑤]
SK 김민수가 다문화 유소년들에게 전하는 응원
프로농구 서울SK 김민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2002년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에 왔다.
훌리안 파우스토 데르난데스 킴은 어머니를 위해 농구선수로 성공을 다짐했고 김민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도 달았다.
5일 경기도 용인시 양지체육관에서 만난 김민수의 왼쪽 손목에는 ‘KOREA’라고 적힌 팔찌가 있었다. 용인|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5일 만난 프로농구 서울SK 김민수(36)의 액세서리 중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KOREA’와 ‘BASKETBALL’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팔찌였다. ‘팔찌가 인상적이다’는 기자의 말에 김민수는 “큰 의미는 없다. 편한 느낌이 들어 자주 착용한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한다. 거창한 답을 기다렸던 기자가 잠시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르헨티나 특급’이라는 과거 별명이 다소 어색한 김민수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다문화 가정 출신 운동선수로 꼽힌다. 2002년 어머니의 나라로 건너와 대학과 프로를 거치며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도 가족을 위해 성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A매치 기간을 맞아 모처럼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던 김민수를 경기도 용인시 양지체육관에서 만났다.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뒷이야기를 전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뒤를 따를 다문화 가정 출신 유소년 후배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프로농구 서울SK 김민수. 용인|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 아버지의 나라에서 어머니의 나라로
김민수는 1982년 아르헨티나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어식 이름은 훌리안 파우스토 데르난데스 킴. 김민수는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아르헨티나에서의 유년시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정말 미남이셨어요. 체격은 또 얼마나 좋으셨던지. 키가 2m 가까이 되셨죠. 그래서인지 여러 방면에서 일을 할 수 있으셨죠.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시면서 동시에 농구와 WWE 선수로도 활약하셨어요. 덕분에 가정형편이 조금은 부유했죠.”
남부럽지 않은 가정 속에서 김민수는 일찍 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인기가 높던 태권도를 먼저 시작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농구공을 잡게 됐다. 김민수는 “가족들의 신체조건이 정말 좋았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작은아버지와 고모는 키가 각각 197㎝와 183㎝ 정도였다. 나 역시 키가 훌쩍훌쩍 자라면서 농구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1998년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김민수의 환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세는 점차 기울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르헨티나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닥쳐왔다. 아직 고등학교도 가지 못한 김민수는 생계를 위해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14세 소년이 아르바이트를 위해 이곳저곳에 뛰어든 이유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김민수는 농구공을 끝내 놓지 않았다. 그리고 2002년 주위의 제안을 받고 경희대 입단 테스트를 치르기로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나라에서 어머니의 나라로, 김민수의 인생 2막이 시작됐다.
“대학에 와서는 하루 종일 농구만 했어요. 한국말을 아예 할 줄 모르니 다른 취미를 갖기도 어렵고…. 코칭스태프의 전술을 이해하기도 참 어려웠죠. 그렇지만 이후 학교 어학당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적응을 할 수 있었어요. 1년 정도 지나니 동료들과도 대화가 됐고요. 아, 참. 처음에는 얼마나 답답했던지. 책으로 된 국어사전을 항상 끼고 다녔다니까요. 그렇게라도 한국말을 해보려고요.(웃음)”
프로농구 서울SK 김민수. 용인|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
● 다문화 유소년 향한 따뜻한 조언
‘아르헨티나 특급’ 김민수의 등장은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아직 다문화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건장한 체격을 바탕으로 대학 무대를 휩쓴 김민수는 국내에서도 초미의 관심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2003년 택한 귀화는 그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2006년. 김민수에게 꿈만 같은 시간이 찾아온다. 바로 국가대표 발탁이었다. 도하아시안게임 농구국가대표팀 명단에 김민수란 이름 석 자가 정확히 새겨졌다.
“어머니께 태극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자체가 정말 기뻤어요. 사실 한국에 오기 전 어머니께선 ‘한국에 가면 많은 부분이 힘들지도 모른다’면서 아들을 걱정해주셨는데, 이렇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뿌듯했죠. 평소 무뚝뚝하던 형에게도 전화가 오더라니까요.(웃음)”
값진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 포워드는 이후 프로 무대로 뛰어들었다. 2008 KBL 신인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의 뒤를 이어 1라운드 2순위로 지명된 김민수는 데뷔 첫 해였던 2008~2009시즌 전 경기를 소화하며 14.3점 5리바운드를 기록하고 KBL 무대에 안착했다. 비록 신인왕은 하승진에게 넘겨줘야 했지만, 이에 못지않은 활약을 펼친 선수가 김민수였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민수는 이제 30대 중반 베테랑으로서 팀에 보탬이 되는 중이다. 가장 오랫동안 SK 유니폼을 입은 프랜차이즈로서도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김민수는 “이제는 다문화 가정 출신으로서 여러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 많다”며 뿌듯해했다. 이어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선 한국말을 잘 배웠으면 한다. 언어에서 어려움이 없어야 선수로도 성공하기 쉽다”고 말한 뒤 “건강관리도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다치면 생명도 끝이 난다. 허리와 발목, 무릎, 발가락까지 성한 곳이 없는 내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인터뷰 말미에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더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제가 어머니의 나라에서 지금까지 잘 생활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나를 위해주고 아껴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용인|고봉준 기자 shutout@donga.com